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4. 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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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나는 집안에 아무 보탬도 주지 못하고 밥만 축내는 법벌레에 불과 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입이라도 하나 줄여야 부모님한테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집에는 돈 버는 사람이 없으니 곶감 빼먹듯 있는 살림 줄여서 먹고 사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집도 팔고 셋집으로 옮긴 듯했습니다. 나는 집 판 계약금을 훔쳐 도망갔다가 다시 들어왔지만 별 부끄러움도 몰랐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도 나를 나무라거나 닦달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훔쳐가지고 나간 액수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람으로서 이미 내 본연의 인격을 상실한 인격상실자요, 탕자에 다름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불과 한두 달 사이에 너무나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나를 위로하거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은행에 다니는 친구에게 여비를 얻어가지고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중·고등학교시절) 우리 집에서 밥도 많이 얻어먹은 친굽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국내제일의 국책은행지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끼니때가 되면 어머니가 친구들까지(시계사건 주인공도 포함) 밥을 차려주시곤 했는데, 없는 살림에 친구들 식사대접까지 하려니 어머니 속이 무척이나 상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미워하게 됐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끝나고, 그해 봄이었습니다. 나는 용산에서 미 8군이 있는 삼각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던 나는 용산에서 서울역까지 걸어가면서 길을 가는 미군들과 영어회화연습도 할 겸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하우스보이라도 하나 얻어걸릴까 해서였습니다.

 

   내가 막 삼각지를 들어서는데, 몇 발짝 앞에서 낯익은 고등학교동창생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여러 가지를 도와주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다니면서부터 고학을 한 친구였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러운 것을 알고 학급회비 같은 것도 내가 요령껏 해결해주곤 했었습니다. 점심 때는 시내에 있는 제과점에 가서 가끔씩 빵을 사먹이곤 했었습니다.

 

    나는 학급반장으로서 학급회비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머니에 항상 잔돈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영수증처리를 했으며, 학급에서 결산보고를 했기 때문에 쓰고 모자라는 돈은 헌책을 팔아서 보충해놓곤 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 손을 잡고 모 신문사 용산보급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신문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보급소에서 얻어먹고,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용산 시외버스주차장 부근일대를 담당하는 신문배달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하루에 조·석간이 다 나오는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용산 시외버스주차장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은행에 입사를 했거나,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내 신세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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