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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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고개-
이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생의 한 고개를 넘어온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중학교부터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우수했습니다. 중학교졸업시험에서는 전체 4등을 하는 우등생이었습니다.
중학교시절 내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담임선생님께서 기어코 상고로 가라 하셨습니다. 선생님보다는 은행원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강권에 따라 상고를 택했습니다. 집에서는 누구 한 사람 내 진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전체 5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나는 상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렇듯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일학년 때부터 나는 학급반장을 했습니다. 특히, 나는 영어실력이 우수했습니다. 중3부터 고3까지 담임선생님이 줄곧 영어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말고는, 담임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좋았고, 꿈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대외활동도 활발해서 서울에서 매년 열리던 한국기독학생회 하령회에 두번(고2때와 고3때) 학교대표로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일등모법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산골에서 농사만 짓던 부모님은 일자무식인데다 농사일밖에 몰랐습니다. 시골에서 가지고나온 살림밑천은 아는 사람한테 사기도 좀 당하고, 형의 사업자금으로도 얼마쯤 날린 모양이었습니다. 내 위에 누나는 일찍이 집을나가 어는 도시에서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중학교 때 한두 번 월사금을 붙여주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살림밑천으로 조금 가지고 있던 논도 팔고, 집 주위에 수백 평 가지고 있던 밭뙈기와 전원풍경의 그림같은 집도 팔려나가고, 살림살이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농사꾼이 논밭 없으면 뭘 해먹고 살겠습니까?
나중에는 기찻길 옆에다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살았습니다. 이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는 정말 힘든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친구 집에서 가정교사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나에 대한 친구의 배려였는데, 친구가족들의 눈치가 보여서 오래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가정교사를 전전하면서 간신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