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3. 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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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기독학생회 여름캠프에 학교장의 여비보조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집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참석을 했었고, 서울물을 약간 먹어서 막연하게나마 서울에 대한 동경심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길로 누나 집에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우선 어머니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교엔 가야 한는데, 학비독촉에 담임선생님의 차가운 시선 또한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당시 고3학생들은 진학-반, 취직-반으로 분류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취직-반에 속해 있었습니다. 담인선생님은 영어선생님이었고, 반장이면서 영어 잘하는 나를 몹시도 미워했습니다. 월사금을 제 때에 내지 못 내고, 공부시간에 질문을 많이 한 이유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내 기독학생회 간부이고, 총학생회 유엔학생부장이였던 나는, 서울에서 개최되는 한국기독학생 여름캠프에도 담임선생님이 참석을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교장선생님의 여비보조를 받아 학교대표가 아닌 옵서버자격으로 참석하게 됐습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미워하는 실력없는 선생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도 상쳐받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학교가기가 싫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니한테 미움받고, 학교에서는 담인선생한테 미움받고, 나는 아무 것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나는 여름방학이랍시고 방 한 칸에서 결혼도 하기 전에 동거하고 있는 누나 집에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집에도, 학교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학일이 한참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으나 학교에는 가지를 못했습니다. 일 년 가까이 월사금을 못 내고 버텨왔는데 빈손으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이 참석을 반대했는데, 교장선생님한테 여비보조를 받아 한국기독학생회 여름캠프에 참석을 했으니 담임선생 볼 면목도 없었습니다.

 

   고민 고민 끝에, 나는 우리 집 전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재봉틀 모가지를 빼가지고 전당포로 갔습니다. 그 길로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고, 집에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혼전동거를 하고 있던 누나와 매형이 결혼날짜를 잡아놓고 우리 집으로 결혼식을 올리러 갈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에는 누나 결혼준비를 해놓은 것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결혼준비를 해놨겠습니까??

 

   다행히 매형 될 사람이 경상도남자여서 혼수장만을 신랑측에서 하는 관습 때문에 조금은 덕을 봤을 것입니다. 나는 가지고온 돈을 다시 집으로 보냈습니다. 당시엔 내 인생문제보다는 누나 결혼문제가 더 큰 중대사였습니다. 재봉틀 전당잡힌 그 돈이 결국 누나 결혼축의금이 된 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