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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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녀의 일기장을 뒤져보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그녀의 부모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 분들을 모시고 가 그녀의 소재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사시는 곳은 우리 집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시 그녀가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녀의 외가는 우리 집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매일 산책을 나가는 길가에 그녀의 외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가출소동이 있고 난 후, 나는 나대로 내 갈 길을 찾아 집을 떠나와야 했습니다. 나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끝나는 그해,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범학교 3학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나는 그녀가 아무 탈 없이 학교를 졸업하기만을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그녀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녀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교사로 발령을 받았거나, 기타 사회인이 돼서 벌써 몇 개월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고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처지는 까맣게 잊은 채 그녀를 꼭 한번은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월 어는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내 입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구두도 한 켤레 장만해 신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으로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녀의 부모님도 전에 사단이 있고 난 후라 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면소재지의 한 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친절하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딸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주소를 순순히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모친은 나를 경계하는 눈치가 역역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쯤, 그녀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빨리 재회가 이루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께서 내가 집으로 찾아왔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를 만나지 말도록 당부의 말씀을 하기 위해서 딸에게 전화를 한 것이 그만 나의 출현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의젓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별 말 없이 추억의 장소를 몇 군데 들렀습니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사이에는, 이제는 성인으로서 밤을 함께 지내도 된다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와 내가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행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일말의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찾지 말고 그냥 보내줄 것을…
내가 서울에서 가정교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여름방학 때 서울까지 와서 나를 찾아 헤맸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사라진 나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내가 바라던 대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아름답고 성숙한 숙녀가 돼서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서로 훌륭한 사회인이 돼서 행복하게 살자고 굳게 언약을 했었는데......,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내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의 부친에게는 형편상 내가 지금 대학교 휴학 중이라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거짓말로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