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4. 14.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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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고개-

   

   나는 다시 용산 시외버스주차장으로갔습니다. 거기는 그래도 항상 사람과 자동차가 북적거리는 사람 사는 곳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을 학대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기웃거리던 나는 문득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인생,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주차장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운행 중인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일상용품 등을 파는 잡상인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나도 하나의 직업을 가진 정상적인 사회인이 됐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부모형제로부터 버림받고, 친구한테 버림받도, 군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고독한 방랑자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술을 마셨지만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장사하고 밤에는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도 전에처럼 자학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나는 동창생들이나 몇몇 아는 사람들에게 내 신상이 어느 정도는 알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창피고 뭐고 이미 체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때 주차장엔 내 또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군 제대를 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온 친구들도 있었고, 그 바닥친구를 따라 새로 얼굴을 내민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마땅히 할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 차에 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 시절 한참 유행하던 장사방법이었습니다. 거기엔 집에서 포도밭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육군은 물론, 해군출신, 해병대출신 등, 서울이 고향인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장사가 끝나고 저녁엔 또 친구들과 술을 먹고 어울려 다녔습니다. 나는 서울이 고향인 해병대출신 친구와 잘 어룰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보다도 더 악바리 해병대출신 행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차장을 통과하는 모든 시외버스운전수에게 무조건 신문 한 부씩을 넣어주고 돈을 손쉽게 버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의 연애편지를 6개월간 대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일찍 주차장에 터를 잡은 친구였습니다. 수입이 괜찮아서 그 친구는 신문을 팔아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대필한 연애편지를 전달할 때마다, 나는 그 친구의 술을 얻어먹었습니다.

 

    당시 나는 비교적 늦게 그 바닥에 합류한 건달이었지만 주먹이나 깡다귀로 봐서는 누구에게도 안 빠진 실력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서너 살 연배인 사람들 하고도 다 친구로 지냈습니다. 당연히 같은 또래들은 나를 형님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력 있는 주먹파로 인정을 받은 것은, 어느 날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보다 그 바닥에서 행세한지도 오래 됐고 또 덩치도 큰 한 친구와 권투스파랑을 해서 유감없이 내 권투실력을 보여준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미 그 바닥에서 꽤나 알아주는 주먹이었습니다.

 

    나도 군에 입대를 했으면 제대할 때였습니다. 군 신체검사에서 1을종을 받은 나는 보충역에 편입되어 군에도 못가고 아까운 세월만 보냈습니다. 군에 입대만 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어느덧 20대 중반이 됐습니다. 귀중한 인생의 황금기를 나는 이렇게 건달생활로 허비했습니다. 나는 체격은 좀 작아도 소위 말하는 깡다귀가 있고, 권투실력이 있어서, 항상 앞장서는 기질이었습니다.

 

   집에 포도밭이 있는 친구와 해병대제대를 한 친구가 같은 동네에 살았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자주 어룰려 다녔습니다. 포도밭이 있는 친구는 부잣집 아들로 제대 후 별 할 일이 없어서 우리와 어울렸고, 해병대친구는 동생과 함께 우리와 차에서 장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