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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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는 그럭저럭 수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나는 해병대친구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우리는 방을 하나 얻어 친구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친구동생과 또 취학전 조카여석 하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밤에는 그 조카여석 공부도 돌봐주었습니다. 근 오 년여 만에, 나는 조금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 해병대친구는 서울토박이로 집에 농사도 많이 짓고 방앗간도 하고 있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전 재산이 다 없어지고, 그때 달랑 기와집 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위에 형들이 넷씩이나 있었지만 다 한량들이었습니다.
큰형은 육이오 때 행방불명 되었고, 둘째 형은 매을 술이 고주망태였습니다. 셋째 넷째는 매일 밖에서 굴다가 돈 떨어지고 아쉬우면 과부형수가 근근이 살림살이를 구려가는 집에 들어와서 가끔씩 어려운 살림을 축내곤 했습니다. 친구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부된 형수와 그때 스무 살 된 조카딸이 중학교를 종업한 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와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해병대친구는 제가 벌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집을 나와서 방을 하나 얻어 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남은 본가마저 팔리게 되었습니다. 넷째 형이 집문서를 잡혀먹은 겁니다. 친구네식구들은 집을 줄여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이 친구네 역시 그 많던 재산을 변변한 직업도 없는 형제들이 그냥 놀면서 이렇게 저렇게 다 들어먹고 달랑 그 집 한 채 남은 것이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그 집에다 문간방을 하나 더 들여서 세를 놓았습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한방에서는 여자들이 전부 기거를 하고 또 한방에서는 남자들이 기거를 했는데,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헤어졌다 다시 만난 가족처럼 아주 당연한 일인 양 그렇게 해병대친구네 권속이 됐습니다. 그 집에 이사를 해서 우물도 새로 팠습니다. 친구네 집엔 이미 혼기가 찬 여동생과 스무 살 된 여자조카와 어려서 양자로 키운 어린남자조카 그리고 어머니 형수 총 여덟 식구가 함게 살았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한 가정의 안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친구조카의 가정교사 겸 또 한 사람의 아들처럼, 그렇게 친구네 가족이 됐습니다. 그런데, 친구 집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친구어머니의 이야기인즉슨, 그 많던 재산이 다 거덜나고, 큰아들이 행방불명 되고, 집안이 쇠락한 것이, 다 큰며느리 잘못 들어온 탓이라 했습니다. 식구들이 온통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며느리 팔자 탓이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전사통지서가 와서 유가족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호적에 그냥 행방불명자로 남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실종신고를 해서 호적이 정리되었습니다.
내가 친구 집에서 한 식구처럼 생활한지도 어언 일 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를 아들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시던 친구어머니께서 나에게 은밀히 간절한 부탁을 하나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 부탁이라는 것이 이랬습니다. 중간에 나를 내세워 당신 큰며느리와 손녀딸을 따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간절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