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4. 2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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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고개-

  

   새로 시작한 직업이 제약회사 영업부사원이었습니다. 영업부사원이라고 해서 약국을 상대로 해서 영업을 하거나, 또 서울에서만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국을 무대로 하는 약장사였습니다. 물건은 먼저 주고 약값은 농촌에서는 추수 때, 어촌에서는 성수기나 몇 개월 후 일시불로 받는 약장사였습니다.

 

   1970년대 초, 그  당시에는 보험회사간부로 있었다고 하면 판매회사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직업이었습니다. 무형의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형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능한 영업사원들은 선불을 받고 여기저기 상품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팔려다니기도 하고, 한때 인기가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십전대보탕이니, **육미지황탕이니 등을 만들어 외판을 전문으로 하던 그 제약회사가 지금은 청심원(환) 등 한방약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일류제약회사로 성장 발전했습니다. 

 

   식구들하고 먹고살자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습니다. 보험모집을 하러다니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나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추수 후 일시불로 받는 조건으로 약장사를 했습니다. 농촌이나 해안지대 등 전국을 무대로 하는 약장사였습니다.

 

   팔자에 역마살이 낀 탓이지, 나는 2~3년 동안 장돌뱅이처럼 이렇게 또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종로5가 한의원골목에 눌러앉았습니다. 남의 한의원에 눌러앉아서 한약건재도 팔고, 녹용들어가는 보약도 팔고, 소위 돌팔이한약사 겸 한의사가 됐습니다. 당시 제약회사외판원들이 전국적으로 한약을 선전하고 다녔기 때문에 한약에 대한 인식이 좋은 때여서 약장사는 꽤나 수입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방이 둘에 마루가 딸린 조금마한 집 한 채를 사게 됐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는 남의 집 전세방을 얻기도 쉽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이 둘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니까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방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있다가 우리가 살던 그 집은 장모님한테 물려 주고, 대지가 50평에 방이 다섯 개나 되는 큰 집을 사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금전적으로 조금 무리를 했지만, 우리는 이 집에서 두 아들을 기죽이지 않고 키우고 또 초등학교 공부를 시켰습니다.

 

   두 아들 다 공부를 잘해서 학급반장이나 부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큰아들은 5학년 때 재학생을 대표해서 졸업식송사를 읽기도 했으며,  6학년 때는 전체 학생회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작은아들도 늘 반장 · 부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아이들 학교출입이 잦았습니다.

 

   나도 가끔씩 아이들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고, 큰아들이 전체 학생회부회장을 맡았을 때는 교장·교감선생님과 육학년 전 선생님들을 음식점에 모셔다  한턱 근사하게 대접을 하기도 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