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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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동생의 죽음은 부모님보다는 형과 내 책임이 큽니다. 나는 형이리고 그 동생 살아생전에 별 도움이 못됐습니다. 그래서 어려서 도와주지 못한 것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기 위해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우리 집에세 같이 살게 되었는데, 끝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처와 아들 하나를 남겨 둔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나나나 서로 중요한 시기에 헤어져서, 특히 심적으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습니다.
또래아이들이 다 공부할 나이에 집안이 파산지경에 이르러서 아버지가 제 입이나 얻어먹으면서 기술이나 배우라고 이발소에 맏겼던 것이 인생의 한으로 남은 것 같았습니다. 제 위로 형들이 셋씩이나 있었어도 각자 살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불쌍한 동생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큰누나는 고향산골에서 8 남매를 낳아 다 훌륭히 키웠습니다. 아들 다섯에 딸이 셋. 팔남매를 훌륭히 키워냈습니다. 아들들을 다 대학까지 졸업시켜 출세시켜놓고 달들도 큰딸만 빼고는 다 고등교육을 시켜 결혼시켰습니다. 이제 자식 자랑하면서 떵떵거리고 살만하니까 무슨 마귀의 시기를 받았는지 환갑을 겨우 넘기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막둥이동생은 전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해서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첫째 딸은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둘째는 지금 대학생입니다.
막둥이동생은 내가 다니던 상고를 나와서 지금 국내제일의 국책은행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은행에 다니면서 대학교도 졸업하고 형제들 중에는 가장 복도 많이 받고 또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나는 명색이 큰아버지로서 조카들 크는 모습도 못 보고 살았습니다. 변명 같지만, 나는 그동안 자식들 문제로 지방으로 도시로 자주 옮겨 다니는 바람에 미쳐 동생들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형이 죽고 난 후, 마땅히 내가 집안의 장남노릇을 해야 하는데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동생들과도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형네식구들도 보고 싶지 않았고, 다른 형제들도 더불어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이 모든 게 다 내 탓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나는 형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전에, 나는 형님의 큰딸과 큰아들인 조카들에게 저희아버지에 대한 내 속 마음을 털어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동생들한테 너무나 무정했던 저희아버지의 태도와, 어머니장례를 치른 후, 저희아버지의 조의금처리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사실, 형님의 부모형제에 대한 감정과 자기 자식들에 대한 감정은 또 다를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가난의 대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부모형제를 멀리하고 자기 자식들한테 몽땅 애정을 쏟았을 것입니다.
나는 두 아들을 고등학교까지만 졸업을 시켰습니다. 큰아들은 재수를 시켜서라도 대학에 보내려고 했지만 본인이 재수는 싫다고 했습니다. 본인은 지방대학이라도 가고자 했지만 실력이 장담할 수 없었고 또 고학이라도 하면서 끝까지 도전해보겠다고 했으면 그렇게 했을 텐데, 그냥 쉽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큰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정비공장에 일 년쯤 다니다가 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군에 가기 위해서 1 종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따가지고 갔습니다.
작은아들 역시 대학에 갈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큰아들하고는 연년생이지만 생월이 7월이라 제 형보다 2년 늦게 학교에 입학을 해서 내가 종로 5가에서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을 때 고 3이었습니다. 실력이 웬만했으면 한의대에 입학을 시켜서 내가 이루지 못한 한의사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냥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점점 내 기대에서 빗나갔습니다. 작은아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조금 다니다가 특공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우선 군복무부터 마치도록 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