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46-
나는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가장이 한 발짝씩 앞을 향해 전진하면, 식구들이 반 발작씩이라도 따라오고 또 가장의 생활철학을 어는 정도는 공유해야 하는데, 식구들의 의식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 차이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내 인생살이는 항상 답답하고 고독했습니다. 이 고독을 달래기 위해 나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스스로 내 자신을 정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식구들에게 보조를 맟추려면, 일단 나 스스로 사회적 전진을 멈춰야만 했습니다.
내가 보험회사에서 조금만 버티고 있었으면 아마 지사장(지점장) 발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보험에 대한 미련 일체를 버리고 보험업계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중 제일 큰 원인은 가족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듯 고민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나 개인의 사회적 출세에 대한 이기심보다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는 희망하는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리고 기대와 성취 사이에 균형이 유지돼야 합니다. 기대와 성취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또 번번이 기대가 무너지면, 인생의 삶은 그야말로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한테 거는 기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가족이 서로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고 제반 인생살이에 서로 보조를 맞추면서 한 방향으로 꾸준히 전진햐야 합니다. 한쪽이 정체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상호 긴밀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50세 이후에 인생을 다시 시작하면서도 내 개인의 이기심은 모두 버리고 오직 가족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두 아들이 성인이 되면서부터, 나는 같은 남자로서 자식들한테 정신적으로나마 조금은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변해갔습니다.
둘째여석도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직장에 좀 다니다 군에 입대했습니다. 특공대에 입대를 해서 부대가 경북경산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부대에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부대면회소에 나타난 작은아들은 제 어머니한테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를 본체만체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국군의 날 행사준비로 작은아들이 경기도 의정부에 와 있었습니다. 그때도 큰아들을 데리고 면회를 갔습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도리는 꼬박꼬박 챙겼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나한테는 인사를 한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저희들 나이에 부모형제로부터 버림받고 비참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자식들한테 버림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처지에서 자식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내가 받은 고통을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