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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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며느리가 조금만 더 우리와 같이 살고 있었으면 저희는 42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틀림없이 얻어가졌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형편이 좋아지면 옆 단지에 있는 42평짜리 아파트로 한 번 더 이사를해야겠다하고, 내가 속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 실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34평짜리 아파트도 값이 계속 오르는 중이었고 내 경제사정도 계속 좋아지고 있었으며 또 내 은행신용도도 골드급으로 수직상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계획이 중도에서 그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저희들이나 나나 집(家)에 대한 복덕(福德)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살던 34평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두 집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아들한테는 천만 원을 더 줘서 보냈습니다.
나는 우리 두 식구가 살만한 조그만 아파트 한 채를 샀습니다. 15평짜리 저층아파트였는데 깨끗이 집수리를 하고 몇 가지 살림살이를 새로 들여놓고 하느라 안 써도 되는 돈 천만 원가량을 태질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집에다 투자한 돈은 그만큼 집값에 반영이 되는 것이지만요. 아내와 둘이서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 둘이 사는 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작은아들한테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번이 자식한테 받는 두 번째 배신감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섭섭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4년 동안 손녀딸을 정말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나는 직장엘 다녀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십년 전에는 큰아들 도와준다고 큰아들한테 갔다가 일 년 동안 살림만 해주고 빈손으로 떠나왔었습니다. 자식들이 저희들 살길만 챙기고 손자손녀한테 잔뜩 정을 들여놓고나면 부모를 헌신짜처럼 버렸습니다.
나는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괜히 짜증만 나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한참 늦은 나이에 인생의 자신감을 회복해서 그동안 의욕적으로 살았고 자식들 둘을 결혼시켜서 독립시키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이제 안정을 이루었는데…, 자식들에 대한 기대감의 상실에서 오는 정신적인 공허감이 내 인생을 허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그렇게 습관적으로 먹던 술 · 답배도 끊고 오직 아내와 자식들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식들 키우면서 다하지 못한 아버지 도리를 손자손녀한테 다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하고 일차 헤어지고는 작은아들내외와 손녀딸한테 모당 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 작은아들과 손녀딸하고 헤어진 후 나는 한동안 정신적으로 정말 힘든 사회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산다는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당시엔 가뜩이나 아파트 관리하는데 또 신경써야할 일이 많았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