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5. 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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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새로 부임해간 아파트는 주민들의 관리비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전기기술주임을 관리소장이 겸직하는 자리였는데 가서 보니,  전임관리소장이 그만두면서 기술자들도 모두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관리소장이 전기주임 몫까지 두 몫을 해야 하니까 그만큼 신경도 두배를 써야하고. 책임도 두 배로 커질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직원들 채용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파트 관리소직원들은  관리소장이나 경리 그리고 주임 급 간부사원들만 일근을 하고 전기실기사와 기관실기사 그리고  경비원들은 24시간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근무해본 유경험자가 아니면 아파트에서 근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은 고되지 않지만 월급도 적은데다가 24시간을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면서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처음에 와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파트만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관리소직원들도 직장을 이동하는 시기가 있어서 잘못하면 직원구하는데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겨우 한 사람 채용을 해서 하루 근무를 잘 하고 가서도  다음 날 출근을 안 했습니다. 몇 번을 이렇게 직원 채용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나는 심적·정신적으로 버티다 못해 보름 동안 정신신경과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정신신경과에 드나드는 것이 싫었습니다.

 

   저희 처갓집 근처로 이사를 간 작은아들과 며느리는 자주 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녀딸이 보고 싶으면 우리가 전화를 하곤 했지만 자주 오지도 않았고 저희가 아쉬우면 마지못해 찾아오곤 했습니다. 안부전화를 해도 아들이 하면 했지. 며느리는 안부전화 한 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아들며느리의 태도에 우리내외는 실망하다 못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둘째 해산달이 돼서 우리 집 근처 큰아이를 분만했던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습니다. 저희끼리 나가 살면서 그새 둘째가 생겨서 해산달이 된 겁니다. 둘째는 아들이었습니다. 어쨋든 나는 부모로서 도리를 다했습니다. 병원비 일체를 치러주고 며칠 몸조리도 시켜서 보냈습니다.

 

   우리는 4년 동안 손녀딸 키워주면서 아이한테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을 우리가 다 썼습니다. 분유나 애기 옷 그리고 일상용품 모두를 값보다는 질을 우선시하고  대부분 중급 이상으로만 사줬습니다. 4년 동안 아들네 생활비도 다 내 월급에서 썼습니다.

 

   작은아들 신혼 초에 우리가 아파트를 처음 사서 이사를 했을 때도 저희들은 7인승 새 승용차를 한 대 샀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할부로 구입했던 아들 차 할부금 만기가 됐는데 그때도 아들이 나한테 손을 내밀었습니다. 잔금 낼 돈이 부족하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선뜻 돈 이백만 원을 그냥 보태줬습니다.

 

   아내가 돈을 주면서 아들며느리한테 한 이야기는 ‘ 나중에 아버지가 집에서 놀고 계시면 이 돈 아버지 용돈으로 내놔야 한다.’ 이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그리고 제 자식들한테도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