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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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장생활을조금 더 해서 자금이 좀 더 모이면, 나는 공장 터를 조금 사서 큰아들이 하는 특장차와 작은아들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정비사자격증으로 자동차서비스공장을 하나 차려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꿈을 가지고 큰아들 곁으로 왔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특장차기술을 가지고 있고, 작은아들은 이것저것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자동차정비사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항상 가족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는 나 자신의 의지는 되도록 죽이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내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조금씩 줄여서 먹던 술도 끊은지 오래됐습니다.
내가 술·담배를 계속했다면, 지금 이렇게 생활기반을 잡지도 못했을 것이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추슬러서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도 오직 가족 사랑과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식들한테 바라는 것은 늙어서 봉양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호강스럽게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곁에서 얼굴 보며 여생을 살고 싶어서고 또 저희들이 평온한 가정을 일구어가는 것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나는 나이가 40 이 된 자식들을 지금껏 뒷바라지해왔습니다. 그것이 자식들의 봉양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그 진실한 속마음을 몰라주니 참으로 야속합니다. 부모가 서운한 게 있어서 고치기를 원하면, 저희들도 아버지의 기대에 맞춰서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습니가?
나는 항상 내가 먼저 변함으로써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줬습니다. 생각도 바꾸고, 행동도 바꾸면서, 모든 것을 가족의 수준에 맞추고 나 자신을 죽이면서 살았습니다. 아내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자식들의 모든 허물을 내 탓으로 받아들여 용서하고 이해했습니다.
나는 나이 50에 경비원에서부터 출발해서 65세가 넘어서까지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부모가 특히, 아버지가 중심을 못 잡고 또 가정이 안정이 안 되면 그 가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가?
나는 가족의 안위와 안정을 위해서 그동안 나 자신의 모든 에고이즘을 버리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이 팔려 먼저 아내만 이사를 하고, 나는 직장 때문에 혼자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작은아들의 부탁을 또 받아들여 작은아들이 사는 아파트 같은 동 7층에다가 21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샀습니다.
작은 아들은 서울근교에 있는 신도시에 27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사서 저희식구끼리 오붓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손녀딸이 봄에 초등학교에 가야 하고 손자는 유치원에 가야 했습니다. 어려서 손녀딸을 키워주고 헤어진 지 4년만이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