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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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기 전,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직행버스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작은아들 집까지 출퇴근을 하면서 손녀딸을 돌봐주었습니다. 작은며느리가 집에서 놀이방을 하고 있어서 손녀딸이 학원에 다니는 걸 아내가 데리고 다녀야 했습니다.
손녀딸이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발레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아내가 금요일 오후에 우리 집으로 왔다가, 다음 주 수요일에 작은아들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금요일 이틀을 손녀딸 학원 길을 돌봐주고 금요일 오후에 다시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은 아내가 2개월쯤 이런 고된 생할을 했습니다.
큰아들과 또다시 헤어지고 정붙일 데가 없던 아내는 손녀딸한테 몽땅 또 정을 쏟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옆에서 살면서 자식이 필요하면 또 도움을 줘야지요. 이것이 아내와 내가 다시 또 작은아들 곁으로 이사를 하게 된 명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식들한테 얹혀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들이 생활비를 보태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여태껏 물심양면으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식들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은 인생말년의 고독을 좀 면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그걸 너무 몰라주니 참으로 야속하고 때로는 자존심 상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내외는 유달리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자존심 강하게 길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매사에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비굴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이 50 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내 인생의 모든 과거와 현재를 스스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과거를 체념했고 또 현실에도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전형적인 샐러리맨타입이고 절대적인 안정추구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미망의 인생항로에서 갈피를 못 잡고 50여 년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내가 가정을 이룬 것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실 그 반 이상은 방황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깨닫기까지 많은 허송세월을 했습니다. 그 허송세월하는 동안, 나는 아내한테나 자식들에게 내 가장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가장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꼭 운명논자라고 말할 수 는 없지만 내 운명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역학서적을 읽었습니다. 나는 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엉뚱한 삶을 사는 것인가!? 나는 왜, 정상적인 인생항로에서 벗어나 갑자기 엉뚱한 길로 빠져들었는가!? 나는 한때 종로 5가 한의원에 있으면서 여러 한의서적과 四柱大典(사주대전), 姓名철學(성명철학) 등 주역에 관한 서적들을 두루 읽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들어서 안 지식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배운 내 지식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내 인생의 운명과 實存(실존)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나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식들한테 엄한 아버지였지만 자율성을 최대한 허용하는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모든 이기주의를 버렸습니다. 가장의 독선적인 이기주의는 가족전체를 고난으로 몰고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서로 본능적이고 운명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특히, 가장의 운명은 가족전체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