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고독
또 하나의 고독 /춘몽
저년놀, 붉은 노을 속의 봄은 무르녹았다. 삽연히 불어오는 봄바람은 얼었던 대지와 사람의 마음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얼어있던 상호의 마음도 조금 풀리고, 가슴엔 한가닥 서기지망이 미구에 돋아날 새싹처럼 빈미주룩이 솟아나고 있었다.
“ 상호 씨! 그럼 이따 만나요. 안녕….”
으밀아밀 속삭이던 미스 조의 다정한 목소리를 마음에 되새기며 상호는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시간은 아직도 30분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는다고해서 공부가 될 것도 아니고, 차라리 밖에 나가 싱그러운 봄바람이라도 쏘이는 것이 기분전환을 위해서도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저녁의 만남으로 인해 미상불 멋진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보니 마음 또한 설레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남녀 간의 약속은 여자 쪽에 유리하도록 결정되는 게 상례지만, 미스 조는 상호의 편의를 배려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나왔다. 오느냐 가느냐의 문제를 상의할 것도 없이 그녀가 오는 것으로 정했고, 상호는 장소와 시간만을 일러줬을 뿐이었다.
약속다방도 상호가 가자면 도보로 불과 십여 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미스 조가 오자면 버스 편으로 한 시간여의 먼 거리였다. 이러한 미스 조의 적극적인 태도와 스스럼없는 말씨는 산뜻한 애인의 속삭임처럼 상호의 마음을 부풀게 하고 또 재롱스러운 딸의 애교처럼 상호의 귓속을 즐겁게 했다.
처음엔 농 반 진 반 별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것인데, 일의 진행이 기대이상으로 진지해지자 상호는 사뭇 마음이 긴장되고 또 한편으로는 성급한 성취감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애당초 불은 이쪽에서 먼저 당긴 것이데, 어쩌면 저쪽에서 더 성급하게 타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녘하늘에서 저녁놀을 밟던 태양은 우연愚淵으로 사라지고 거리엔 어둠의 물결이 금실금실 밀려오고 있었다. 도시의 저녁거리는 마치 흐르는 물줄기처럼 인파의 물결로 넘쳐흘렀다.
엉큼성큼 약속장소를 향해 가는 상호는 흡연히 거리의 잡답 속으로 섞여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길행吉行이었다.
“히야! 불과 이틀 만에 이렇게 즐거운 밤이 되다니.......!!”
상호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하,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기분 좋은 날도 생기는구나.........!!”
상호는 가소롭게도 인생에서 무언가 조금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큰 기쁨을 느꼈다.
그간 공부밖에 모르던, 아니 다른 일에는 마음 쓸 겨를이 없던 상호는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틀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자아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해산날이 되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산고産苦를 겪게 될 것이었다.
상호는 정시보다 십 분쯤 먼저 약속다방에 도착 미스 조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리한 위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약속시간이 됐을까 말까, 안경을 쓴 미스 조가 여옥기인如玉其人의 모습으로 막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상호의 손짓을 대뜸 알아차린 미스 조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자늑자늑 상호 쪽으로 걸어왔다. 산뜻한 봄 색깔의 투피스 차림이었다.
상호는 여전히 검 · 청색바지에 골덴 홈스펀의 노타이 차림이었다.
“ 어서 오세요. 이렇게 멀리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미스 조를 맞았다.
“아니예요! 저도 바람 좀 쐬고 싶었거든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미스 조가 밝게 웃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미스 조의 모습이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아닙니다. 자 앉으시죠!”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오던 연이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불과 차 한 잔 마시는 시간 정도의 만남이었는데, 서로 구정舊情 같은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 사람 사이엔 말이나 행동으로서가 아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의 전류가 흐르는 듯싶었다.
그동안 커피 두 잔이 탁자에 놓이고, 두 사람은 서로 차를 권하며 동시에 찻잔을 들었다.
“참, 그 숙제 말입니다….”
상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문제의 그 숙제를 구실삼아 대화의 매듭을 풀었다. 미스 조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아직요…, 제 머리 가지고는 그 숙제 못 풀겠어요. 그리고 때가 되면 자연히 풀리게 된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상호는 그 ‘때’ 라는 말에 힘을 주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미스 조는 잔뜩 호기심어린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 자아 그럼, 그 숙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상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예의 그 숙제를 메모지에 적어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숙제의 답이 바로 오늘 날짜를 가리키는 글자입니다. ‘靑(청) 無(무) 柱(주), 香(향) 無(무) 頭(두)’ 라. 푸를 청 없을 무 기둥 주. 향기 향 없을 무 머리 두. 자, 보세요! ‘靑’ 자에 기둥이 없으면 三月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다음, ‘香’ 자에 머리가 없으면 十八日이 나옵니다. 맞지요!? 그래서 ‘오늘 삼월 십팔일 한 번 만납시다’ 하고, 내가 미스 조에게 프러포즈 한 겁니다.”
상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풀고 나니 싱겁죠? 무슨 문제든 답이 나오면 싱거운 법입니다.”
“네에 정말 그렇군요!! 오늘이 삼월 십팔일이네요.....!!”
미스 조는 그날이 3월 18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기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내심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문제의 답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큰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문제의 답이 시의적절하고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고 멋진 문제였다.
순간, 미스 조는 상호의 인상에서 풍기는 예리한 지성미에 새삼스러운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총명하고 지적인 눈, 높은 이상을 상징하는 우뚝 솟은 콧날, 조리 있는 언변이 있고, 뜨거운 심장을 지녔을 것 같은 사나이. 포근한 마음씨의 영락없는 학교선생님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갑자기 상호의 존재가 가슴전체를 파고드는 뻐근함을 느꼈다.
미스 조에게는 짜장 중요한 일순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소망해오던 꿈속의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미스 조는 어떤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저도 작년까지는 학생이었어요. S여자대학 2 학년을 마치고 자퇴했어요!”
“ (……)그런데 참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공부가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었는데, 괜히 학교생활이 싫은 거예요. 속담에 ‘여편네 팔자는 뒤웅박 팔자요, 남편이 반 팔자’ 라고, 어차피 결혼하고 생활에 정붙이면 그만인데, 더 배워서 뭐하겠는가? 그리고, 공부를 한다는 게 결국은 장차 사회에 나와서 활동할 준비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굳이 돈 들여가면서 골치 썩힐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학비야 아버지께서 걱정 없이 대주는 형편이었지만. 내가 학업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다방에 뛰어들므로서,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경제적인 계산을 한 거지요......”
“네에, 그랬었군요!?”
상호가 짧게 답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미스 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 조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이야길 계속했다.
“처음엔 카운터에서 직접 돈을 만지고 관리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다방종업원에 대한 손님들의 편견과 관능적인 친절에 저항감이 생기면서 조금씩 현실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거에요! 꿈과 낭만을 키우던 캠퍼스의 추억이 그립고, 이것저것 생각이 복잡해지는 거예요. 매일 손님들한테 듣는 관능적인 대화보다는 좀 더 가슴을 적셔주는 차원 높은 대화가 그리웠어요. 다방에 오는 손님들의 이야기가 다 그렇고 그런 뻔한 스토리잖아요?”
미스 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상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연히 상호 씨가 저희다방에 오신 거예요. 사람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사람이고, 정이고, 또 사랑이고, 뭐 이런 것들이 사실 저한테도 소중한 문제거든요!!”
미스 조는 다음 말을 삼키고 그윽한 시선으로 상호를 응시했다. 상호 또한 의미 있는 눈짓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상호는 잔잔한 가슴의 동계를 느끼며 미스 조의 고백을 가슴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이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자신에 비해 미스 조는 훨씬 솔직하고 용기 있는 여자였다.
상호는 순간적으로 자괴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결코 털어놓고 싶지 않은 자신의 약점이며 치부였다.
다방 안의 분위기도 뒤숭숭했지만 상호는 심히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때 그 놈의 알코올이라는 것이 필요한 건데…, 그건 때와 장소가 적당치 못하고, 젠장 담배라도 한 대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상호 씨! 우리 밖으로 나가요.”
얼굴에 의미 있는 교소嬌笑 를 머금은 미스 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의 손을 끌었다.
얼떨결에 손을 잡힌 상호는 심한 가슴의 동계를 느끼며 미스 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상호는 혼자만이 아는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밤은 은빛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봄바람에 실어 한 아름의 꿈을 뿌려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복잡한 한길을 벗어나 강변 쪽으로 걸었다. 아직은 초봄의 강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 미스 조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말했다.
“상호 씨! 우리 서로 부담 없는 관계로 지내요.”
“글쎄…요, 난 좋은 친구사이가 좋겠소만….”
뜻밖의 미스 조의 제안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여짓거리던 상호는 참으로 막연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미스 조는 더욱 뜻밖의 말을 하고 나왔다.
“우리 서로 장담할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안하는게 좋아요!”
미스 조는 상호를 깍듯이 연인의 입장으로 대하며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분위기를 리드해나갔다. 그러한 미스 조의 진취적인 기상에 상호는 벼름벼름 사랑의 감정을 느껴가고 있었다.
강변모래밭엔 꽃샘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은 생생화육 만물을 자라게 하는 봄바람 부는 속에 앉아 풍월주인 듯 꽃보라처럼 익어가는 봄의 향취와 하박하박 익어가는 사랑의 정취에 취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꽃샘바람을 피하려는 듯 서로의 체온으로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사랑을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어는 결에 가슴이 뜨거워진 상호는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을 찬미하며 음풍영월 어는 외국시인의 시구를 빌어 조용히 사랑을 노래했다.
‘밤은 일천 개의 눈을 가졌네
낮은 하나의 눈뿐
그러나 태양이 꺼지는 날
세상의 불빛은 사라지리.
마음은 일천 개의 눈을 가졌네
가슴은 하나의 눈뿐
그러나 사랑이 끝나는 날
인생의 불빛은 사라지리.’
아, 밤은 진정 사랑의 역사를 창조한 컴컴한 음부陰部였던가!?
“상호 씨, 잠깐만요….”
갑자기 상호의 곁을 떠난 미스 조는 천진한 소녀처럼 몇 발짝 비켜 앉았다. 순간, 수압을 못 견디고 쏟아져 흐르는 수도꼭지의 흐름 같은 소리가 상호의 귓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방심하고 터져 흐르던 그 소마소리는 드디어 덜 잠긴 수도꼭지의 수압 걷히는 소리로 막을 내렸다. 그 소리의 여운과 속곳을 치켜 입는 미스 조의 동작은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 요부凹部를 상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속곳을 치켜 입는 그녀의 동작은 상호의 뇌리에 에로스의 화살처럼 와 꽂혔다. 그것의 자극은 순식간에 상호의 허리로 전달됐다.
우그르르, 간절한 성욕이 가마솥처럼 끓어오른 상호는 우럭우럭 얼굴이 달아올랐다. 동시에 강렬한 소유욕에 휩싸인 상호는 지성과 의지의 갈등 속에서 오슬오슬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결단을 주저하고 있던 상호의 머릿속엔 멋진 시구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용자 외에는 그 누구도
용자 외에는 그 누구도
용자 외에는 그 누구도
미인을 구하지 못하리.’
그렇다. 용기 있는 자만이 인생도, 사랑도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 한다. 대담하게 저질러라…
마음 속으로 두런두런 자신을 추스르던 상호는 추위와 휴식을 핑계 삼아 어느 한 여인숙에 방을 얻어들었다. 미스 조는 호리지차의 저항도 없이 언죽번죽 동행 입숙하였다.
참으로, 난생 처음 갖는 황홀한 밤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독이 바로 오늘밤을 잉태하기 위한 산고産苦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상호는 그 황홀한 밤이 영원히 새지 않기를 바랐다.
“명숙 씨, 당신은 우리의 인연을 어떻게 생각하오? 인연, 그것은 가장 신비스러운 눈을 가진 운명이라고 했소!!”
간절한 포옹 속에서 상호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상호 씨, 난 그런 어려운 말 잘 몰라요. 단지 상호 씨의 현재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예요. 상호 씨가 그랬잖아요? 과거는 흘러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오직 우리에게 소중한 건 지금 이 시간뿐이라고......”
“원인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아요.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서 또 필연성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오!”
이것은 상호의 말이었다.
상호는 미스 조와의 관계를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생각하고 싶었다. 상호는 문득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글귀가 생각났다.
“현대여성의 미는 동적이고 능률적인 데 있으며, 덕의 매력과 성의 매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이상적인 아내상은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애인처럼 산뜻하며, 딸처럼 재롱스러워야 한다고….”
미쓰 조가 꼭 그런 여자처럼 생각되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 불타는 욕구에 서로를 합치려는 듯 강렬한 포옹 속에서 몸살을 앓는 환자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제신諸神과 인간의 손과 발을 저리게 하고 가슴속의 분별심을 마비시키는 에로스는 두 사람을 완전히 합일시켜 태고의 원형原型으로 돌아가도록 충동질하고 있었다.
상호가 말했다.
“명숙 씨! 사랑은 이론도 학설도 아니오. 사랑은 오직 사랑 속에서만이 확증되는 생명적인 사실이오. 명숙 씨! 남녀간의 결합은 결국 생식을 의미하며, 생식 그것은 멸망하는 우리 인간 속에 깃든 불멸의 것이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이오….”
“………!?”
미스 조는 말없이 상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여성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잔인할이 만큼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실로 호홀지간의 순간이었다. 상호의 이야기와 사고思考는 무거운 짐이 되어 미스 조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미스 조는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성숙한 완결의 순간을 와해시켜 버렸다. 상호는 강제를 써서 미스 조의 거웃을 더듬었다.
“상호 씨, 이러면 나 소리 지를거에요!”
“명숙 씨, 나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오!! 생명의 신 에로스에 맹세하여…”
상호는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 애욕에 찬 얼굴과 들뜬 음성으로 호소하듯 말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소. 하지만, 사랑은 사랑 속에서만이 확증되는 생명적인 사실이란 말이요. 그러므로 인간의 수명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존재하는 것이오.”
미스 조가 상호의 가슴팍을 밀치고 일어나려 했다. 상호는 조닐로 간청하는 미스 조의 시선을 거역하지 못했다.
“잠깐만요. 나 화장실에 좀 다녀오고요......”
상호는 간절한 포옹을 풀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한 이불 속까지 함께 한 미스 조의 마음만으로도 그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저항은 여자가 지닌 최소한의 방어본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상호는 생각했다. 사랑, 그것은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랑, 그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강제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 그것은 이 땅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타당하게 결합해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희생을 즐겨 바칠 수 있어야만 진실한 사랑이라고….
미스 조가 빠져나간 이불 속에서 상호는 슬그머니 잠사蠶思에 빠졌다. 미스 조는 서로 부담 없는 관계를 이야기했지만, 상호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그녀를 대하고 싶었다.
이틀 전 늦은 밤이었다. 서울 서대문 아현동고개에 있는 한 세탁소에서 고학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길가 건물 2층에 있는 한 다방엘 들렀었다. 친구와 만나 독한 소주라도 한 병 들이켜야만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이상 때문에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기어코 S대 인기학과 입학만을 고집하다가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신 상호는 시간제가정교사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지동지서支東支西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호의 내부세계에는 여전히 자신의 내적-심적현상의 절대적 주체인 이상이 타고 넘어야할 산처럼 요지부동으로 뿌리박고 있었으며, 또 눈앞엔 외적현상의 총체인 현실이라는 세계가 피할 수 없는 강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이렇듯 두 다른 엄연한 사실 앞에서 상호는 참으로 무서운 고독 하나를 체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이 이 사회로부터 낙오된 것 같은 무서운 고독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고독 속에서 상호를 구원해주는 것은 순간순간 이성을 마비시켜주는 독한 알코올과 어두운 밤이었다. 그래서 상호는 정서의 예방주사를 맞듯 밤마다 독한 알코올로 답답한 가슴을 달랬다.
그리고 또 밤은 상호의 초라한 신분과 그늘진 마음을 감출 수 있는 은밀한 은신처였고 또 자유자재로 자신을 소유하면서 마음 놓고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무대였다.
그 주 무대는 다방이었다. 1960년대 초 길거리엔 공중전화도 없었다. 전화를 걸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위스키 술 생각이 나거나, 시장기가 나서 우유나 계란반숙을 먹고싶으면 다방으로 가면 모두가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신청곡 음악감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상호는 그즈음 한참 다방출입이 잦았다. 그리고 다방마담이나 레지들이 베풀어주는 직업적인 친절에 이끌려서 그리고 가끔 단골손님한테 서비스하는 위스키 한잔씩 얻어먹는 재미에 맛들어서 다방을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만큼 다방출입에 대한 이력이 쌓여있었다.
웬일일까? 조금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안에 손님은 들어서는 상호 혼자뿐이었다.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안경을 쓴 젊은 아가씨가 커운터에서 무언가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며 상호는 털버덕 자리에 앉았다.
“뭘 드릴까요?”
처음 상호의 출현에는 무심하던 그녀가 상호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카운테에 선채 다짜고짜 차 주문을 재촉했다. 마치 손님의 작위의무(해야만 하는 의무)를 인식시키려는 듯 극히 사무적이고 직업적인 음성이었다.
“나 위스키 더블로 한 잔 주시오. 꾹국 눌러서….”
그녀의 직업적인 태도에 심사가 꼬인 상호는 뜻밖에도 엉뚱한 주문을 하고 나왔다.
“위스키요!?”
“그렇소. 난 위스키 아니면 안 먹습니다!”
“다방에서 무슨 술이에요??”
“술로 마시려는 게 아니요! 약으로 먹는 겁니다. 백약지장百藥之長이란 말도 모르십니까?”
상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다시 정색을 하고 나오다가 백약지장이란 생소한 말에 호기심이 생겼음인지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약지장이요?”
“그렇소. 백약지장이요!! 위스키가 당신들한테는 술이지만, 나는 약으로 먹는 겁니다. 물론, 비주정주의자들은 잘 모를 것이오만….”
상호는 상대방의 입장을 싹 무시하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와 같은 상호의 불손한 언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상호 앞자리에 앉으며 여유를 가지고 넌지시 물었다.
“무슨, (……)상처를 입으셨나요?”
“천만에 말씀을…, 상처를 입었으면 죽자 살자 사랑을 해야지 왜 알코올을 찾습니까?”
상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알쏭달쏭한 상호의 말에 그녀는 잔뜩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사랑은 상처에 붙이는 고약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덴 사랑이 약이고, 마음의 정체를 뚤어주는 덴 알코올이 약이란 말입니다. 최고의 명약이라 이 말입니다….”
상호는 싹 다른 분위기의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손님은 저희다방에 오늘 처음 오신 것 같은데, 처음 오신 분이 처음 듣는 특별한 말씀만 하시네요?”
“그러니까, 특별한 손님한테 서비스하는 거 한 잔 내오시오. 앞으로 나도 이 다방에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잖소!?”
“아니,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게 뭡니까? 사람에게 제일 소중한 건 역시 사람입니다. 그것도 지금 서로 마주하고 앉아 있는 당신과 나 사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가슴 속에 있는 ‘정이고, 사랑’ 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쏟아놓지 못한 철철 넘치는 ‘정’ 이 내 가슴 속에 가득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니, 그 철철 넘치는 ‘정’을 몽땅 이 다방에다 쏟아놓을 수도 있다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하시네요?”
“남은 힘들여 진실을 말하는데, 비웃는 건가요?”
“아, 아니에요. 그런데, 주정은 안 하시나요?”
“네, 내 사전엔 아직 주정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좋아요. 오늘 손님 특별대우 해드리는 거예요.”
“고맙소. 친절은 성공의 맏며느리라고 했습니다.”
“……!?”
안경 속의 동공이 더 크게 확대된 그녀는 말없이 주방 쪽으로 갔다.
상호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탁자에는 위스키 더블 잔이 승리자를 기다리는 축배처럼 정중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위스키를 고봉으로 부어서 잔속의 위스키가 고혹적인 빛을 발하면 자란자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잔을 보는 순간 상호는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잔만 보고도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 앉아서 상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미스 조는 다정하게 물었다. 상호가 누구며 뭐하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아, 네에…,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통성명도 못하고 앉아 있었네요! 나, 안 상호라고 합니다. 직업은 가정교사구요. 잠시 머리 좀 식히려고 근처에 있는 친구 좀 만나러 왔다가 늦은 밤에 전화할 데가 없어서 그만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네에…, 저는 조 명숙이라고 해요. 이 다방 주인 딸이에요.”
“네에, 부사장님이시군요? 아무튼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불가에서는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오 백(500) 겁의 인연이라고 했는데, 혹, 우리가 장차 서로 소중한 관계로 발전할 지 모르니, 부부연과도 같은 칠천(7000) 겁의 인연은 맺은 셈입니다.”
상호는 장황하게 자기소개를 하고는 미스 조에게 무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미스 조! 아니 명숙 씨, 아까 무례하게 군 거 용서하십시오! 오늘 내가 명숙 씨에게 숙제를 하나 내고 가겠습니다. 메모지하고 펜 좀 빌려주시고, 다방전화번호도 좀 적어주십시오.”
미스 조는 상호의 거침없고 일방적인 언사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다방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 상호에게 건네주었다.
“옛날 한 선비가 흠모하는 규수에게 요즘 말하는 연애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그 규수에게서 이런 답장이 왔었다는군요. 청 무 주(靑 無 柱), 향 무 도(香 無 頭). 이렇게 여섯 글자를 적어 보내왔드랍니다. 명숙 씨, 이 문제 내일모레 점심 때까지 풀어야 합니다.”
상호는 자기말만 한참 늘어놓고는 휭하니 다방 문을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또 한 번, 그 숙제를 핑계 삼아 미스 조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 날 아침에 또 점심에 전화를 해서 숙제를 풀었는지 묻고는, 미스 조가 숙제의 답을 풀지 못했다는 말을 하자, 그러면 만나서 그 숙제의 답을 함께 풀자며, 그날 밤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미스 조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호는 방에 놓여있는 미스 조의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봄날, 별빛이 쏟아지는 고독한 밤이었다.(끝)
※ 지은이의 말 : 1960년대 초 서울의 여인숙들은 대개의 경우 여인숙 전체손님들이 화장실 하나를 함께 사용하는 구조였고, 화장실에 가려면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가서 복도 중간쯤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