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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라한 몰골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자랐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잠자리신세를 지던 친구 집에서 논농사 가을추수를 거들어주고 있었습니다. 할 일도 없었지만 내 입 벌이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돈도 좀 필요했습니다. 보름쯤 일을 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사일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습니다. 추수가 끝났으니까 돈이라도 얼마쯤 주겠지 하는 기대를 걸고 친구 집엘 갔습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열려 있던 대문이 그날따라 굳게 닫쳐 있었습니다. 모름 정도 매일 출근을 했으니까 당연히 사람이 집에 있으리라 믿고 갔습니다.
언뜻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대문이 닫혀 있으니 그냥 집으로 올 수밖에요. 점심때쯤 됐을 겁니다. 친구어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내 눈치를 보더니, 느닷없이 우리시계 내놓으라는 뜬금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시계를 말씀하시는 거여요…!?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회중시계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계가 없어졌으면 파출소로 가서 신고를 해야지, 도대체 어째서 나한테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친구어머니한테 대들고 항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당하는 일이어서 그냥 어안이 벙벙하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습니다.
나는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하자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길로 파출소에 신고를 했습니다. 하늘이 노랗고, 눈 앞이 뿌옇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완전히 정신이 나갔습니다. 술에 만취한 나는 인사불성이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입에 술을 댔습니다. 술을 잔뜩 먹고 친구 집까지 간 것은 생각이 나는데, 다음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날 이후, 나는 술을 마시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우리는 초가집일망정 우리 집을 가지고 있었고, 그 친구네는 그동안 남의 셋방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그해 집을 한 채 장만하고, 논도 조금 사서, 그해 가을 처음으로 수확을 하는 것이엇습니다.
친구는 어려서 집을 나가 서울에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형이 사진기술이 있어서 그동안 돈을 제법 벌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얼굴도 말쑥하고, 서울 말을 쓰고 있었는데, 성격도 좋아보였습니다. 우리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보름이상 일을 했으니까 정식일꾼 임금으로 계산하면 품삯이 꽤나 됐을 것입니다. 그 품삯 줄 돈이 아까워서 아들친구를 도둑으로 몰다니요…!??
사실, 탁상시계 하나 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보름이상 농사일을 하고 탁상시계 하나와 품삯을 바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너무나 빤한 수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