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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방을 큰아들내외한테 내줬습니다. 작은아들한테 한 것처럼 똑같이 해주었습니다. 허구한 날 쪼들리고만 살아온 큰아들네 식구들이 안쓰러웠습니다. 돈이 조금 들어도 자식들의 기를 좀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명분은 당시 중학교 2학년짜리 큰손자 뒷바라지였습니다. 돌이 조금 지나서 키워준다고 살림을 합쳤다가 헤어진지 십 수 년여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도리를 다시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집안 살림은 아내가 했습니다. 아들내외가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아내가 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도 자식들한테 항상 죄인과 같은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키우면서 아버지도리를 다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면 크게 반대하지 않고 승락을 했고, 웬만큼 자식들이 섭섭하게 해도, 그게 다 이 못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속으로 삭이면서 살았습니다. 아들 둘이 대학교를 못 간 것도 다 내 탓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손자손녀한테 더 정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내 전부를 바쳐서 뒷바라지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쓰는 돈은 아까워도 손자손녀한테 쓰는 돈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나는 싸구려 바지(만원짜리) 하나를 사서 십 년 이상을 입었지만 손자손녀한테는 유명브랜드제품을 사줬습니다.
큰아들과 함께 생활한 세월이 10개월쯤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나는 한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한 것이 점점 후회가 됐습니다. 그냥 떨어져서 따로 사느니만 못하게 돼버렸습니다.
우선, 생활습관이 서로 달라서 함께 사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각자 떨어져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던 것입니다. 우리내외는 아무리 내가 집에서 놀아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도 항상 아침 일찍 같은 시간대에 합니다. 그래야 하루일과를 정상적으로 시작할 수 있고 하루일과를 정상적으로 시작해야만 또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아무리 술을 먹고 집에 늦게 들어와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단 아침산책부터 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어제하루를 반성하고 또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한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 말고는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런 내 생활습관은 자식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나는 아침이면 항상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농사철엔 먼동이 트면 벌서 하루 일과가 시작됐습니다. 겨울에도 일단은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시사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뱄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항상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산책을 했습니다. 몇 십 년을 해온 생활습관입니다. 특히 집에서 쉬는 동안, 나는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부지런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심란하면, 나는 산책을 하면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산책을 통해서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도 다졌습니다.
그런데, 산책에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아들네식구는 자고 있고 아내가 항상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없이 항상 아내가 차려먹이고 설거지도 아내가 했습니다. 평일에는 며느리가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하드래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며느리 제가 좀 일찍 일어나서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 아들며느리는 예나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아니고 며느리가 부리는 가정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며느리는 항상 늦게 일어나서도 항상 떳떳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일어나서 밥상 다 차려놓고 저희들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을 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