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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회사 외무사원이라는 직업이 사실상 술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낮에는 하루종일 이시장바닥, 저시장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저녁에 사무실에 들어오면 먼저 술 생각부터 났습니다. 보험 계약고를 좀 올리고 성과가 있는 날은 기분 좋다고 한잔하고, 하루종일 걸어만 다니다가 공치고 들어온 날은 피곤하고 속상하다고 한잔하고, 이렇듯 보험회사 외무사원이라는 직업이 기본급 조금에 보험 계약수당을 먹고사는 직업이었는데,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직업이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술을 마시다보니, 나는 그 쥐꼬리만한 월급도 제대로 집에 갖다 주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정급료가 조금 있어서 겨우 쌀값 정도는 갖다 줄 수가 있었지만, 결혼을 하고도 내 경제관념은 아주 낙제점이었습니다.
결혼 다음 해(1968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큰애를 낳았습니다. 건강한 사내였습니다. 일 년 뒤(1969년) 음력 칠월 스무 아흐렛날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한참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우리는 장모님하고 여기저기 몇 차례 집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돌잔치까지는 방 두 칸짜리 전셋집에서 장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둘째가 생기고 잠시 떨어져서 각자 살게 되었는데, 장모님이 먼저 시집으로 들어가시고, 우리는 다시 처갓집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아내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애는 장모님깨서 많이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아들한테 항상 미안한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특히, 손자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아들들한테 다하지 못한 부모의 도리를 손자손녀한테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을 쏟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장모님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당시 처갓집에는 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작은 집 한 채 있는 것을 넷째아들이 또 집문서를 들고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내 친구어머니, 말하자면 우리장모님의 시어머니를 봉양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모님 큰시동생은(그러니까 내 친구의 둘째형이고, 나한테는 큰처삼촌) 여전히 매일 술이 고주망태로 자기 앞길도 못 가누는 사람이었고, 딸은 시집을 갔고, 내 친구는 집을 나가 소식도 없이 행발불명 됐고, 막둥이아들은 군에 입대해서 집에는 노인(처 할머니)을 모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며느리 팔자 탓을 하며 헤어져 살기를 원하던 시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그리고 태어나서부터 양자로 키우던 양아들의 정을 못 잊어서 장모님은 결국 술잘 먹는 큰시동생 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장모님은 훗날 우리가 결혼하고 처음 사서 살던 방 두 칸에 마루가 달린 그 작은 집을 당신이 인수를 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양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집에서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습니다. 그리고 양아들도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결혼시켜 손자 둘을 키워주셨습니다.
장모님은 이렇듯 집안 큰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 다하시고, 우리가 안성에서 큰아들하고 살고 있을 때 한 많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