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5. 1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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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천오백세대가 넘는 큰 단지에서 삼년쯤 근무를 하다가  위탁관리회사가 바뀌면서 오백세대가 조금 넘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기기술주임을  겸직하는 조건으로 가서 월급도 삼십만  원쯤 더 받았습니다. 이때 내 나이가 어느덧 환갑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제 자가용으로 두 내외가 출퇴근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버스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 하릴없이 길바닥에서 버스를 기디리고 있을 때는 자존심 상할 때도 많았습니다.  특히,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옷도 다 젖고, 신발도 젖고, 그리고 또 우산을 들고 만원버스에 탈 때면 정말 불편하고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한심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차를 사지 않았습니다.

 

   손녀딸이 참 예쁘게 잘 자랐습니다. 여러 가지 예방주사도 아내가 다 비싼 걸로만 맞춰줬고, 먹는 거, 입히는 거, 그리고 우리 다섯 식구 생활비 모두를  내  월급으로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생활비를 쓰고도 나는 조금씩 저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아들이 제 처갓집 근처로 이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내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큰아들 때도 그랬지만, 나는 억지로 작은아들을 붙들어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꺼냈을 때는 저희들끼리는 이미 결정을 하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우리내외는 저희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아들놈이 참으로 야속했습니다. 우리내외는 사랑하는 손녀딸과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아들며느리를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4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키운 손녀딸에 대한 정이 어떠했겠습니가?

 

   나는 그동안 손녀딸 키우는 재미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손녀딸이 건강하게 자라서 예쁘고 멋진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남은 내 인생의 꿈이었습니다. 손녀딸이 태어나서부터 4년 동안 아내와 내가 쏟은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운 건 아들놈이었습니다.  며느리는 함께 살아도 우리한테 정을 주지 않으니까 크게 섭섭한 건 몰랐습니다. 퇴근하고 와서도 어머님, 하루 종일 애하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따듯한 인사 한 마디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애도 키우고 제 뒷바라지를 하는데도 성격 탓인지 우리한테 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밖에서라도 수시로 전화를 해서 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웬만한 며느리 같으면  낮에 가끔 전화라도 해서 애가 잘 노는지, 시어머니가 애하고 얼마나 힘들게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해서라도 전화 한 번 할 텐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오사바사한 것보다는 낫다며 늘 며느리를 두둔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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