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5. 16.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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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파트 관리책임자로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갔습니다.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향순속(入鄕循俗)이란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근무를 했습니다.

 

    내가 아파트관리소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작은아들에게는 보일러 기능사자격증과 고압가스자격증 및 기타 자격증을 따게 해서 아파트 기관실기술자로 취직을 시켰습니다.  사람이 워낙 성실하고 기술도 있어서 지금은 빌딩관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월급은 좀 적지만 안정된 직장이라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습니다. 며느리도 어린이집교사로 있으니까, 그만하면  두 사람 사는 건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직장에서 24 시간  교대근무를 하다보니 아들이 근무하는 날엔 며느리가 혼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결혼초고 며느리가 임신 중인데 아들 근무하는 날 밤에는 며느리가 혼자 집에 있어야 하고, 아침에 며느리가 출근하고 나면 아들은 퇴근해서 또 혼자 집에 있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살림을 합치자고 간청을 해왔습니다.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저희끼리 편안히 살라고 독립을 시켰는데 이틀에 한 번씩  며느리를 밤에 혼자 있게 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참 안쓰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두 집을 정리하고 며느리가 집사는데 좀 보태라고 내놓은 며느리비상금 조금하고 모자라는 돈은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 2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샀습니다.

 

    나는 근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내 집을 갖게 됐지만 아파트를 아들 명으로 해주고 안방도 아들내외에게 내주었습니다. 우리내외는 문간방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예쁜 손녀딸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내외는 손녀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며느리가 직장생활을 한 탓도 있었지만 큰 손자에게 다 쏟지  못한 사랑을 손녀딸에게 몽땅  쏟았습니다.  밤에도 우리내외가 손녀딸을 데리고 잤습니다. 며느리가 어린이집 교사이다 보니 낮에 애들한테 얼마나 시달렸겠나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좀 힘들어도 밤에 며느리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입니다.

 

    갓난애를 키우고 보살피기 위해서는 밤에도 몇 번씩 잠을 깨야 하잖습니까? 우리내외는 한밤중에도 애가 울면 우유도 타서 먹어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밤잡을 설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밤늦게 뭔지 모르게 애기가 떼를 쓰고 울면 아내와 나는 손녀딸을 엎고 또 안아서 몇 십분씩을 달래야 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손녀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출근이 없는  주말에는 꼭 아들내외가 데리고 자도록 했습니다.

 

   삼년을 지극정성으로 손녀딸을 키우고,  우리는 형편이 좀 좋아져서 인근에 있는 34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아파트를 사서 일 년 이상만 살면 양도소득세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25평짜리 아파트 값이 일년 사이에 배 가까이 껑쭝 뛰었습니다.  융자를 조금 안고 사니까 한 2년 사이에 아파트가 금방 34평으로 늘었습니다. 거기서도 아파트 명의를 아들 명으로 해주고 안방도 또 내주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들한테 얹혀서 사는 모양이라고 오해들을  한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나는 아들며느리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며느리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며느리친정집에서도 집들이 와서 아들며느리가 안방을 쓰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한편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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