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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려서 겪은 역사적 사건으로써는 8.15해방과 6.25전쟁이 있습니다. 8.15해방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고, 6.25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는 날 군인들이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서는 소를 잡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서는 먹자판을 벌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들이 인민군들이었습니다. 윗마을 이장네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밤이면 수시로 나타나서 먹을 양식을 털어가곤 했습니다. 우리 집은 길가에 있어서 우리도 여러 차례 양식을 털렸습니다. 한 패거리가 털어가면 얼마 후에는 또 다른 패거리들이 들이닥쳐서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앞 패거리들이 한 것처럼 또 마을뒷산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마을사람들은 낮에 몰래몰래 소들을 마을앞 산 속에다 숨기고는 나무를 하러가거나 풀을 베러가면서 살짝살짝 보살피곤 했습니다. 우리도 아버지가 우리 소를 마을앞 산 속에다 갖다 숨겨놓고, 곡식 등 중요한 물건 몇 가지는 부엌 밑을 파 땅 속에 묻고는 그 위에다 땔감으로 위장을 해서 숨겨뒀습니다.
낮에는 조용하다가도 밤에는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딱 쿵, 딱 쿵, 하고 총소리가 나면, 뻘겋게 총알 날아가는 불빛이 눈에 훤히 보였습니다.
달 밝은 밤에는 인민군들이 산 속에서 나오는 것도 보이고 또 마을에서 양식을 빼앗아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들고서는 일렬종대로 줄을 지어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였습니다. 한동안 선발대가 들어가면 또 며칠 있다가 후발대가 들어가곤 했는데, 이런 행동은 주로 밤에 이뤄졌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고난 후 한참만에 시꺼먼 비행기(B29 폭격기) 가 날아와서는 마을뒷산에다 수도 없이 폭탄을 퍼붓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낮에는 우리 집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앞마을 신작로 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를 인민군차량으로 오인하고서 딥다 폭탄을 퍼붓고는 하늘이 찢어질듯 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나는 마루에서 점심을 먹다가 또 하늘이 찢어질듯 한 굉음에 놀라 마루 밑으로 숨어들어갔는데, 시꺼먼 비행기가 우리 집 마당텃밭에 있는 오동나무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출몰한 것은 주로 낮 시간 동안이었는데 이런 일은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어쩌면 비행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보고 있다가 꼭 우리를 겁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 한밤중에는 또 인민군들이 수시로 나타나서 마을에서 곡식을 뒤져갔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도 부엌 밑 땅 속에 숨겨둔 옷감과 곡식 등을 몽땅 털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짐을 우리 형한테 지워가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형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우리가족은 그날 악몽 같은 밤을 보냐야만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