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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3년 동안이나 국가와 민족이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렀지만,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나는, 개인적으로나 가족 중 누구 한 사람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고, 마을에서도 먹을 양식이나 옷가지 등 생활용품을 빼앗긴 것 말고는 아무 변고도 없었으며, 그렇게 긴장감 없는 전쟁을 호기심 있게 관망했습니다.
온 나라가 그렇게 전쟁의 와중에서 도시는 불바다가 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고 있을 때, 내가 평온한 유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산골농촌에서 혼놈으로 태어난 덕분이었습니다.
나의 유소년시절은 참으로 평온하고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논밭도 우리식구가 먹고 살 만큼 지었고, 춘궁기에 양식걱정을 하기는 했어도, 죽을 쒀서 먹을망정, 끼니를 굶거나 고통스럽게 배를 곯지는 않았습니다. 농촌에서 사니까 집안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는 일 말고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시사철이 다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봄이면 앞산뒷산에 가서 간식으로 진달래꽃을 따먹고 놀았으며, 여름이면 마을앞개울에서 동무들과 미역을 감고 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가을이면 앞마을뒷마을 중간에 있는 논에서 참새를 쫓으며 가을추수를 도왔으며, 겨울이면 얼음이 언 무논바닥에 가서 않은뱅이 썰매를 타고 놀았습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산촌엔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뱃속이 출출하면 뒷마당 땅 속에 묻어둔 김장독에 가서 싱건지 한 사발 퍼다 출출한 뱃속을 채웠습니다. 또 어떤 날은 무구덩이에서 파랗게 싹이 돋아난 무를 거내다 깎아먹고 트림하면서 냄새피우던 일도 생각나고, 또 생쌀 먹는다고 혼이나면서도 몰래 생쌀 한 주먹 씹어먹고 물마시던 일 등. 겨울 긴긴 밤 배고파서 잠 못 이루던 추억들이 아스라이 생각이 납니다.
여름에 태어난 나는 추운 겨울을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눈이 펑펑 쏟아지면 함박눈을 맞으며 눈밭에 뒤로 벌렁 누어서 전신사전을 박았고, 또 눈사람을 만들면서 재밌게 놀았습니다.
어려서는 재밌게 노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놀다가 좀 집에 늦게 들어가면 그 일 때문에 혼나거나, 하기 싫은 논일이나 밭일을 시킬 때, 말 안 들어서 “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마라 ” 하고, 핀잔을 좀 들은 일 말고는 부모님한테 크게 혼날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