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는 두 달쯤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곧잘 했던 나는 보급소에서 같이 신문배달을 하던 한 친구의 부탁을 받고 중학교 3학년짜리 친구조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문배달보다는 명분 있는 일이었고 또 학교 다니면서 이미 이력을 쌓았던 일이었습니다.
방학동안 나는 열심히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친구조카의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됐습니다.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놓고 칠판에다 공부를 가르쳤고 창문 밖에는 가까이 공동수도가 하나 있었는데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금방 동네에 퍼졌습니다.
방학이 끝나면서 바로 새로운 가정교사자리가 생겼습니다. 목욕탕 집이었습니다. 친구조카는 방학동안만 가르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바로 목욕탕 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습니다.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신문배달을 했던 용산으로 갔습니다. 이발도 할 겸 한번 들러보고 싶었습니다. 신문구독자 이발소였습니다. 이발소에는 항상 여러 가지 정보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래 젊은이들이 항상 북적거렸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고학생들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한 학생이 주인아저씨에게 가정교사자리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용산에 있는 국립 모 단과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침식문제로 크게 고민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아무 연고도 없이 가정교사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학생의 얼굴엔 근심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 날은 그냥 돌아왔습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학생의 우울한 얼굴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돼서 나는 다시 그 이발소엘 들렀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가정교사자리를 구하지 못해 몹시 실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 친구에게 내 가정교사자리를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놀고 있는 사람이고 가정교사자리는 그 친구에게 더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가정교사로 있으면 숙식이 해결되니까 우선 학교를 안심하고 다닐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밤에는 신문구독자 집 학생 한 명을 또 가르쳤습니다. 양복수선 집이었는데 내 식사를 제공하고 약간의 수업료를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용산 시외버스주차장 앞 골목 양쪽에는 무허가 판잣집들이 한 블럭쯤 줄지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양복수선 집 아저씨가 나한테 외아들을 맡기셨는데 나도 성심성의껏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내 가정교사자리를 물려받은 그 친구는 그 집에서 안정을 찾았고, 졸업할 때가지 다른 친구 둘이 계속 후임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공들을 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서울에 와서 고학을 해서라도 꼭 다시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은행에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되, 차라리 대학에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