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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형제와 헤어지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오만 고생 끝에 나는 경제적으로 조금 안정이 되면서 정신적인 안정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정말 오래간 만에, 나는 부모님을 내 집에 모시게 됐고 또 어려서 나 몰라라 버리고 왔던 이발소에 다니는 둘째동생과 한 집에 살게 됐습니다. 막둥이동생은 직장 때문에 은행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내 집에 모심으로써 비로소 나는 하나의 떳떳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식들한테도 떳떳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됐습니다.
당시 우리는 이 큰 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기죽이지 않고 키웠습니다. 옛날 그 시절에도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단독주택에 사는 아이들을 또래에도 끼워주지 않으려고 하는 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와본 아이들 학교 어머니들은 아내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게 되었고, 학교에서도 아이들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항상 순수하고 수수한 옷차람을 하고 다니던 아내의 진면목을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집에 와서 보고 새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손자손녀를 키우면서, 아내는 종종 옛날 두 아이 키우던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아내는 당시 아이들 학교출입이 잦았습니다. 아이들이 반장 · 부반장을 하기도 했지만, 아내는 아이들 학교 어머니합창단원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한 세월이 한 반 년쯤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식사만 하시면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시면서 재미있게 소일을 하시는데, 어머니는 건강도 좋지 않으셨지만, 몸은 작은아들 집에 계시면서 마음은 늘 큰아들과 막둥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엉겹결에 큰아들 곁을 떠나오시고, 막둥이와 헤어져 사는 게 영 불안하셨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생활이 재미가 없으신 겁니다. 어머니의 그런 심리상태를 내가 알아차리고 형한테 전화를 해서, 아무리 바빠도 형이 시간을 좀 내서 어머니 아버지를 좀 찾아뵙도록 부탁을 했으나, 형이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전화라도 한 통화 하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불안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셨습니다. 당신을 서울로 모시고 온 우리를 원망하는 눈치였습니다. 매일 짜증을 내시고 아내를 힘들게 하셨습니다. 효도하며 잘 모시자고 서울로 모셔왔는데…, 그것도 아내가 기꺼이 찬성을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겨우 육 개월을 모시고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나는 자식이지만 어머니의 성격을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이 셋집에다 방치하고 있는 당신을, 버림받은 자식이 그리고 결혼할 때 얼굴도 못 본 며느리가 당신의 말년이나마 잘 모시자고 한 일인데, 그런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면서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이 나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야속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도 다 잊어버리고 부모님의 남은여생이나마 편안히 모시면서 살고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닌 듯싶었습니다. 나도 자식한테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갈등을 겪으며 서로 부대끼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 방식대로 사시도록 해드리는 게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