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인생고개·연재소설

미망의 인생 고개

하이 드림 2009. 4. 2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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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장례를 치른 후 어느 날,  나는 형님 집에 갔었습니다. 안방에는 안 보이던 비싼 자개장이 하나 보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형제들을 불러놓고 장례결과에 대한 경과도 설명하고, 부의금문제제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마땅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조문객이 여러 아들들과 관계되어 있는데, 어찌 자기 혼자, 자기 맘대로, 자기 살림에 보태 쓴다는 말입니까?? 조문객이 모두 자기 손님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런 형의 행실에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 후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형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뒤에 돌아가신 아버지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시신 앞에 엎드려 아무리 울고불고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어버지생전에 6 개월여 동안 내 집에 편히 모시면서 용돈도 드리고 최소한의 자식노릇은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아버지 앞에 엎드려 마음껏 울고 용서를 빌고 또 빌 것입니다. 

 

    내 바로 밑에 동생은 자수성가해서 아들딸 둘씩 낳고 여섯 식구가 그런대로 행복하게 사는 듯 보였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여섯 식구가 먹고 살고, 아들 넷을 공부시키려면, 그 고생 말을 안 해도 다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이 동생이 참 대견스러웠습니다. 한참 집안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이나 배우면서 제 입이나 얻어먹으라고 아버지가 동네이발소에 취직을 시킨 동생입니다. 내가 가정교사로 집안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몇 차례 내 비상금에 손을 대더니,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십수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나대로 가정을 이루고, 저는 저대로 가정을 이룬 후, 우리는 서로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 만났습니다.

 

   나는 그렇게 건실하게 성장한 동생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이 동생 밑에 둘째동생을 아버지가 또 이발소에 보내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 밑에 동생 큰아들이  고생하는 제 부모님 부담을 덜어준다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공군헌병대에 자원입대해서 지금 직업군인으로 있고, 두 딸은 그럭저럭 결혼을 시켰습니다. 둘째아들은 아직 장가도 못간 노총각이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동생이 그 좋은 이발 기술을 써먹지 않고 노동판에서 벽돌공으로 먹고살고 있었습니다. 노동판 일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일거리가 있으면 벌어먹고, 일거리가 없으면 굶어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입니다. 이 동생이 먼저 이발 기술을 배운 바람에 그 밑에 동생도 제 입이나 얻어먹으면서 이발 기술을 배우라고 아버지가 또 이발소에 보냈습니다. 

 

   그런 좋은 기술을 가지고 착실하게 살아가면 될 것인데, 무심한 형들을 원망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 둘째동생이 밖을 떠돌아다니다 결국 객사하고 말았습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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