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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동생은 얼마 안 있어 다른 데로 이사를 했지만, 우리는 서로 입장이 좀 난처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여동생이 더 난처했을 것입니다. 주위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이것저것 좀 난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 신분은 또 친구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옛날 시외버스주차장에서 건달생활을 할 때 알았던 후배 하나가 또 경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나이 50 전후면 젊은 나이인데 저나내나 경비생활하기에는 당시로서는 좀 이른 나이였습니다. 서로 처한 현실이 좀 민망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반가웠습니다.
나는 집에서 식당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좋은 위안과 핑계거리가 됐습니다. 노느니 염불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비생활은 그냥 부업으로 하는 핑계거리로 삼았습니다. 세상 참, 숨어서는 못살지 싶었습니다.
나는 경비원으로 있으면서 적은 월급이었지만 꼬박고박 저축을 해서 큰아들 결혼을 시켰습니다. 큰아들은 군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그때 겨우 스물네 살이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한번 하고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술을 먹고 술주정을 하는가 하면, 문을 쾅쾅 닫는 등, 감히 내 앞에서 폭력시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석이 군에서 후방 독립부대장 운전병으로 있으면서 매일 회식자리에 불려다니며 술을 배워가지고 나왔습니다. 군에서 편하게 잘 먹고 살이 쪄서 몸이 장군타입이었습니다.
한번은 술이 잔뜩 취해 지프차를 가지고 외출을 나왔었습니다. 자동차 키도 어디다 잃어버리고 시동전선을 직결해서 운전을 하고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식들은 먼지 모르게 불만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자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내 뜻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내 기대에 어긋나면서, 나는 나대로 삶의 의욕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악착같이 벌어서 자식들 뒷바라지 해야겠다는 의욕이 점점 식어갔습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두 아들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시켰습니다.
그동안 나는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식구들하고 먹고살고 두 아들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면서 인생살이에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다보니 삶에 대한 만성피로가 쌓이고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부모형제의 도움 없이 참으로 비참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지 처자식을 책임지려고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몇 번의 위험한 고비도 있었습니다. 자식들한테나 아내한테 한두 번의 큰 고비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 새 출발에 대한 유혹과 갈등이었습니다.
나는 생명보험회사에서 한참 잘나가던 시절 내 인생 새 출발에 대한 고민으로 한동안 또 방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이기주의냐, 가족에 대한 책임이냐의 갈림길에서,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나혼만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을 선택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