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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손자를 본 것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나는 식당을 그만두고 큰아들내외와 隣近(인근)에 있는 도시의 한 단독주택 지하 월셋방에서 살았습니다. 큰아들내외를 먼저 이사시키고, 우리내외는 식당을 정리한 후 나중에 살림을 합쳤습니다. 작은아들은 군에 입대를 한 후였습니다.
큰아들이 제대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주거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4~5년간 식당을 하면서 나 모르게 조금씩 진 빚을 청산해야만 했습니다.
식당을 하면 최소한 식구들이 밥은 먹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내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있으면서 아내가 혼자서 식당을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그나마 여의치 않았습니다. 가게보증금은 월세 밀린거하고 기타 잡다한 지출로 그럭저럭 그냥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좀 벌어놨던 재산은 수년에 걸쳐서 이렇게 곶감빼먹듯 야금야금 다 까먹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사회생활 30여 년 동안 정말 지치고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가장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을 했던 것입니다. 수입은 적지만 안정된 직장에서 인생살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좀 추스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장사는 이것저것 신경써야할 일이 많지만 직장생활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출근만 하고, 윗사람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고정된 월급이 있어서 최소한 아내와 내가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슬슬 직업에 대한 자괴감이 생기고 또 경비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경비생활 2년차였습니다.
사실, 경비라는 생활이 자존심 강한 사람은 못 하는 직업입니다. 2년 동안의 경비생활을 하면서 나에겐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나로서는 주민들과의 주종관계와 관리소와의 상하관계에 있어서 정말 아니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저런 사이에 내 나이가 쉰이 넘었고 또 손자까지 봤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하루는 심란한 생각에 잠겨서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매일같이 그날이 그날이고, 매일 경비초소에 들어앉아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굽실굽실 머리나 조아리면서 산다는 게 참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조간신문 광고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 있었습니다. 모 이름 있는 건설회사의 직업훈련생 모집광고였습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