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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 어느 정도 인생의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웬만한 인생의 장애물쯤은 앞으로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나는 온 식구가 근심걱정 없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같이 살기를 희망했습니다.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던 나는, 매일 아침 손자여석 과자류를 사들고 퇴근을 했습니다. 돌이 지나 한참 말을 배울 때고 혼자서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가 돼서 손자여석이 아주 귀여운 짓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승용차는 아들며느리와 함께 출근할 때만 사용했습니다. 먼저 며느리를 회사에 내려주고, 나를 아파트에 내려주고, 두 아들은 한 회사로 출근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들들 출근시간에 나는 퇴근을 해야 하닌까 퇴근할 때는 버스를 한 번 타고 내려서 삼십 분 쯤 걸어가야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걷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그해 겨울 어느 날은 눈이 많이 와서 승용차를 운행할 수 없는 날도 있었습니다. 우리삼부자는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삼삽 분쯤 눈길을 걸어 나가 다시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 일도 있었습니다. 의젓하게 사회인으로 성장한 두 아들과 함께 하는 일상이 나에게는 참으로 그지없는 행복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도 우리를 부러워했습니다. 마침 큰아들이 근사하게 새집도 지었고 건장한 남자 셋이 매일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고 또 며느리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돈도 좀 있어 보였을 것입니다.
자동차는 할부로 샀기 때문에 폐차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삼백만원이 넘는 수리비를 들인 덕분에 차는 새차가 됐습니다. 나는 우리가 살던 집 방세보증금하고 그동안 조금씩 모아둔 비상금하고 몽땅 털어서 자동차수리비로 날렸지만 마음은 편했습니다. 주머니에 돈은 없어도 안전한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사는 데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렇듯 큰아들과 함께 한 일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엔 내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큰아들은 그 사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며느리도 회사를 몇 차례 옮겨 다니고 하더니 슬그머니 그냥 집에 들어 앉아버렸습니다. 은행에서 융자받은 빚도 있을 터인데 큰아들내외가 제대로 직장생활을 안하니 생활비를 매달 내 월급으로 해결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작은아들 월급까지 축을 냈습니다.
큰아들 소개로 작은아들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개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까 작은아들은 출근할 명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가정에 자구만 불화가 생겼습니다.
작은아들은 참다못해 회사를 그만두었고, 형제끼리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속이 상해서 큰아들과 다투다 또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